태권도 문화원(원장 오노균)에서 주관하고 오노균태권도TV, 세계태권도 연합신문, 국제무예올림피아드가 공동후원하는 이달의 태권도 영웅으로 멕시코 태권도 대부 문대원 대사범이 선정 됐다.
문사범은 지난 44년 동안 30만 명의 제자를 배출했고 이 가운데 유단자가 4만여 명이 넘으며 멕시코 전역에서 4백50개의 도장을 직접 운영하고 있다.
또 멕시코에서 '태권도의 전설', '멕시코 태권도 대통령', '그랑 마에스트로(대사부)'로 불리는 자랑스런 한국인 이다.
충남 홍성 출신인 문대원 대사범이 태권도와 인연을 맺은 것은 대전중학교 시절로 올라간다. 1962년 경희대 정치외교학과 2학년 때 유학차 도미 했다. 텍사스주립대 건축학과에 입학한 공인 태권도 2단의 그는 이듬해 오클라호마에서 열린 무술대회에 우연히 출전해 우승을 하기도 했다.
당시 태권도는 미국에서 이름이 없었고 대부분 일본인이 전파한 가라테가 판을 치던 시대였다. 그들과 호구도 없이 맞붙어 체급에 관계 없이 3년 연속 통합 우승을 차지했다.
초기 미국에서의 태권도 보급시절,
키가 2m가 넘는 거구를 넘어 뜨리고 두꺼운 벽돌을 손날로 깨뜨리자 난리가 났었다고 한다.
이후 무술 잡지의 표지 모델로 선정되기도 했고 전국의 무술대회에서 초청장이 쇄도했다. 그러다가 운명적으로 멕시코 무술대회에까지 초청을 받게 되어 멕시코로 들어갔다.
1968년 멕시코 땅을 처음 밟은 문사범은 이듬해 정식 태권도 사범으로 멕시코에 정착했다.
'코리안 가라테'로 아는 태권도를 멕시코인들에게 제대로 알리기 위해 '무덕관'이라는 태권도장을 열었다.
도장 정면에 붙어 있는 일장기와 일본 가라테의 전설인 마부니의 초상을 떼어 버리고 태극기를 붙여 나갔다고 한다.
문사범은 "처음에는 수련생 대부분이 가라테에서 태권도로 전향한 동호인들이었어요. 1959년부터 보급된 가라테는 알고 있어도 태권도는 생소한 동호인이 많았죠. 하지만 제게 배운 제자들이 1969년부터 1975년까지 멕시코 전 무도대회에서 모두 우승하면서 태권도가 가라테를 앞섰죠." 라며 당시를 회상 했다.
1회, 2회 세계태권도세계선수권대회(1973년~1975년)에서 멕시코가 3위를 차지 하면서 멕시코에는 태권도 돌풍이 불기 시작 했다. 이에 힘입어 문 사범은 1976년 '멕시코 태권도협회'를 창립했다.
문대원컵 전국 태권도 대회는 타오르는 태권도 열풍을 부추겼다. 집 없는 멕시코 소녀들이 2~3년간 머물며 직업교육을 받는 기숙학교나 한국 수녀가 운영하는 기숙학교 등을 찾아가 태권도를 가르쳤다.
현재는 멕시코 프로태권도 보급을 통해 또 다시 제 2의 태권도 붐을 일으키고 있다.
다혈질의 멕시코인들에게 태권도 정신을 심어주며 모범적인 멕시코인들을 배출하는 문대원 대사범은 그동안 멕시코 정부로부터 훈장과 수많은 표창장을 받았고 한국 정부에서도 그를 초청해 포상했다.
태권도 정신을 통해 멕시코인들의 삶을 바꾸고자 노력하는 자랑스런 태권도인이다. 인생에서 승자는 경기에서 금메달을 얻는 사람이 아니라 삶의 순간마다 자신을 이기는 사람이라고 믿는 태권도 사범. 그렇게 무도로서 태권도 정신을 가르친 것이 많은 멕시코인을 변화시키고 세계태권도인들에게 귀감이 되어 문대원 대사범은 4월에 “태권도영웅”으로 선정 됐다.
문사범은 "태권도는 단군 이래 한민족에게 주어진 가장 큰 선물로 이제 태권도는 한국만의 것이 아니라 세계의 것이다"고 강조 한다.
태권도 문화원이 태권도인의 명예선양 사업의 일환으로 문 대사범을 선정한 오노균 원장은 "평생을 태권도 발전에 공헌한 문대원 대사범을 태권도인의, 태권도인에 의한, 태권도인을 위한, 분"이라며 태권도영웅으로 극찬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