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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일리피플 | DailyPeople

해리의 "태국 이야기"(8) 미얀마 탈출하는 로힝야족의 엑소더스

미얀마 탈출하는 로힝야족의 엑소더스

 

미얀마를 떠나 방글라데이스로 향하는 로힝야족의 행렬(AFP)

 

태국과 서북쪽으로 국경을 맞대고 있는 미얀마에서 수십만 명의 난민이 발생해 인간의 존엄과 국가란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을 던져주고 있다.

 

지난 8월 25일 미얀마 정부군과 미얀마 소수민족인 로힝야족 무장단체(ARSA)의 충돌 이후 9월 25일 현재 무려 40만 명 이상의 로힝야족이 미얀마를 넘어 방글라데시 국경을 향한 것으로 동남아 각 언론에 보도되고 있다. 거의 맨 몸으로 탈출하고 있는 이들은 들판과 구덩이에서 들개처럼 잠을 자고 심각한 배고픔과 질병에 노출된 상태다. 빈국인 방글라데시가 이들을 달가워하지 않고, 바다를 통해 주변국인 태국 등으로의 상륙을 시도하지만 불법 이민자로 규정해 오갈 데 없는 신세다. 탈출민들의 상태가 심각하자 로힝야족 무장단체는 지난 9월 10일에는 스스로 한달 간의 즉각적이고 일방적인 휴전을 선포하고 나섰다. 미얀마 군은 ARSA의 공격으로 촉발된 전투에서 ARSA 400여명을 사살했다고 발표하기도 했다.

 

버마인이 주류를 형성한 가운데 130여의 소수종족으로 구성된 미얀마는 불교인구가 가장 많다. 무슬림인 로힝야족은 미얀마 서부 라카인주에 주로 거주하는 수니파 무슬림들이다. 미얀마에 약 100만명 거주하는 것을 알려져 있다. 이들은 미얀마가 영국 식민 지배를 받던 1885년 방글라데시에서 유입된 이주민들의 후손이라는 게 미얀마의 주장. 당시 영국은 로힝야족을 미얀마의 지배 계층으로 삼고 식민 지배를 공고화했다. 영국은 미얀마인들의 토지를 수탈한 뒤 방글라데시 노동 인력을 농사에 이용했으며, 미얀마 지배를 강화하기 위해 이들 로힝야족을 준지배 계층으로 등용했다고 한다.

 

1948년 미얀마(당시 국명 버마)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하자 미얀마 당국은 로힝야족에 대한 탄압에 나섰다. 특히 1982년 이전부터 해당 지역에 거주하였음을 입증한 소수민족에게만 국적을 부여한다는 내용으로 시민권법을 개정한 뒤, 로힝야족에게는 시민권을 부여하지 않고 불법 체류자로 대했다. 그 밖에 불교로의 개종 강요, 토지 몰수, 강제 노동, 이동 및 결혼 자유 박탈 등의 각종 탄압 조치를 가했다. 이에 대해 로힝야족은 자신들은 8~9세기 무렵부터 아라칸(지금의 라카인) 지역에 정착하였던 아랍 상인들의 후손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미얀마의 주류를 이루는 버마족과 정부는 이들을 벵갈리(Bengali)라 비하하면서 소수민족의 하나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미얀마 정부의 탄압을 피하기 위해 로힝야족들은 1970년대부터 방글라데시는 물론 선박을 이용해 태국이나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등 인근 국가로의 탈출을 시도했다. 그러나 대다수 국가에서 이들 수용을 거부하면서 바다를 떠도는 보트피플이 됐다. 또 인신매매 등 인권유린 상황에 처해지자 국제 문제로까지 대두됐다. 유엔은 2012년 로힝야족을 ‘세계에서 가장 박해받는 소수민족’의 하나로 규정하기도 했다.

 

현재 로힝야족과 관련 가장 비난을 받고 있는 사람은 미얀마의 실권자로 알려져 있으며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아웅산 수치 여사다. 반 인권적인 로힝야족 사태에 대해 확실한 입장 표명을 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아웅산 수치 여사는 로힝야족을 탄압하는 불교계의 지지를 받고 있다.

 

이슬람 국가를 중심으로 일부에선 소수민족에 대한 잔혹행위를 묵인하고 있는 아웅산 수치에 대해 노벨상을 박탈해야 한다는 비판까지 제기되고 있다. 또 한편으론 수치의 정치적 영향력이 군부의 장악력에 못미쳐 로힝야 사태에 개입하기엔 한계가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른바 군부와의 관계가 악화할 경우 민주화 동력 약화로 이어질 것을 우려한다는 것이다. 한편 2015년 유엔난민기구의 추산에 따르면, 2012년 이후 보트피플이 돼 바다를 떠돌고 있는 로힝야 난민은 8만 6000명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